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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자르크 님의 선물

1월 11일 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 狂者進取 狷者有所不爲也

by 아날로그맨🐳 2024. 1. 12.

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 狂者進取 狷者有所不爲也

부득중행이여지 필야광견호 광자진취 견자유소불위야 <논어>

 

20대 중후반~후반까지 근무했던 회사는 전자부품을 유통하던 회사였다.

나를 포함하여 4인 규모였는데 일이 많지 않은 편이었다. 아니, 적었다. 한가했다.

내 생각에 한 달치의 일을 몰아서 한다면 2, 3일이면 해낼 수 있을 것 같을 정도였다.

사무보조로 들어간 내 업무는 찾아서 일을 해야 할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매일 할 일이 없이 앉아 있다는 것은 천하태평인 내 성격으로도 자괴감이 들게 만드는 것이었다.

인터넷 서칭을 하나 업무를 하나 보기에는 비슷한 모양새이니 아마 초기에는 인터넷 서칭을 하면서 시간을 떼웠을 것이다. 

 

자기애가 강한 젊은 사장님은 아마 나를 배려해서라기 보다는 자신의 관대함을 과시하기 위하여 나에게 빈 시간에 공부를 하고 싶으면 하라고 하였다. 음 지금은 이게 나와 사장님 중 누가 먼저 꺼낸 제안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회사에서 공부를 해도 되었다.

 

내가 공부할 만한 것으로 고른 것은 한자였다.

인터넷서칭을 하다가 누군가 사이버 서당의 유료 아이디를 공유해준 것을 보기도 했고,

자격증과 같은 목표가 없는 순수한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 즈음 읽었던 신영복 선생의 강의라는 책의 서문에서 우리가 영어를 배울 때에는 "I'm a dog." "I'm bark." 와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지만 한자는 천자문이 그러하듯이 우주만물의 이치를 다루는 데서 시작한다는 글에 매료된 것도 이유가 되었다. (아마 지금이라면 그러려니 하면서 그리 끌리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또 한자 문장을 반복하여 읽으면 뜻에 맞게 저절로 띄어 읽기가 된다고 하여, 특별한 비결 없이 우직하게 공부하면 통달하는 건가 싶어 좋게 느껴졌다.

 

아무튼 그 당시 사이버서당에 있는 다양한 강좌들을 골라가면서 인터넷 강의를 집에서도 듣고 회사에서도 들었다.

공부하는 느낌도 좋았고 내용에서도 배움이 되는 부분이 많아 좋았다.

 

그날 익힌 문장 쓰기는 집에서 하였는데, 그 당시에는 내 책상이 없어서 안 쓰는 상을 펴서 했다.

상이 헹주로 닦아도 안 닦이는 데가 있어 하얀 전지를 깔았는데, 형광등의 밝은 빛이 하얀 전지에 반사되면서 - 내 생각에는 - 시력이 떨어진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던 것 같다.

 

아마 사자소학, 천자문, 명심보감 이런 강좌를 먼저 듣고 그 다음에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이런 순서로 강의를 들었던 것 가다. 내가 한자 공부를 한다는 얘기를 듣고 진경언니였나, 미영언니였나로부터 논어집주, 맹자집주를 받게 되었다. 기홍오빠와 송아언니는 둘 다 같은 옥편을 갖고 있다면서 옥편을 하나 주기도 하였다.

 

이 즈음 나는 성실한 실천력으로 삶을 충만하게 만들어 늘 감탄과 존경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기홍오빠와 친하게 지냈었다. 기홍오빠는 성실성의 미덕을 깨닫게 해준 사람이었고 오빠의 조언과 진심어린 격려, 이것이 응원이다라고 할 만큼 적극적이고 따뜻한 응원 속에 이러저러한 것들을 시도하고 예전보다는긴 실천기간을 유지하곤 했었다. 

 

음악이나 라디오를 들으며 한자쓰기를 매일 1시간 정도 했던 거 같다. 

교양 한자도 잘 모르는 수준이었는데, 같은 한자를 반복해서 쓰는 게 아니라 그날그날의 문장을 따라 한번씩만 쓰는것이었는데 그 시간이 누적되니까 신기하게 한자도 어느정도 익혀졌고, 한자 문장의 구조도 조금 익힐 수 있게 되었다. 나름 성실하게 습관을 들이고 성취감도 얻게 되었던 이 소중한 경험은 몇년 후 진로를 완전히 바꿔서 교대 입시 준비를 오로지 ebs 동영상 강의로 해도 괜찮았던 밑바탕이 되었다. 

 

한자 공부는 소중하고 유익한 경험이라서 계속 이어가고 싶어 "장자"를 써보거나 우리 선조의 산문글 원본 등을 출력해 보면서 소소하게 짧게 시도해 보기도 하였고, 수능 이후에 다시 해야지 싶었으나 결국 끊어졌다. 

음...결국 끊어졌으나 연작언니의 선물로 가늘게 다시 이어진 셈이니 또한번 인생은 변주곡이다.       

 

이 긴 이야기는 오늘의 문장이 논어 출신이라 떠올라 덧붙였다.

반가운 마음에 예전에 썼던 공책을 찾아보았는데 이상하게 초기 공책은 사라졌고 맹자를 썼던 공책부터 남아있다. 

논어 썼던 공책은 어디로 갔을까??

 

대신 맹자에서 저 문구를 인용했던 문장이 있어 그것을 보며 추억에 젖어 보았다.